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한글을 쓰는 대한민국 국민이지만 모두들 알고 있는 영어 욕의 대명사 빡큐가 고려에서 서양으로 전해진 말이라면 믿으시겠습니까

이 놀라운 사실로 들어가 보겠습니다.~~

아~~먼저 말씀드리지만 지금부터 하는 포스팅은 실제 사실이 근거지만

재미를 위해 각색해서 작성하는 글임을 미리 알려드립니다.

그리고 글 말미에 재미를 위해 쓴 내용이 어디인지 알려드리겠습니다.

때는 고려 말기 충렬왕 시절

박유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.

문관 출신으로 대부경(종3품)까지 역임했으니 지금으로 보면 장관이나 차관급 정도 보면 되려나요.

여기서 잠깐 팁 하나 드리면 고려 시대에 충ㅇ왕이 많은데 그 이유는 원나라의 간섭기 시기였다고 보시면 됩니다.

충ㅇ왕의 충자가 충성할충이거든요.

그러니까 원나라에 충성한다 이거죠~

1275년 박유는 원나라에 보내지는 공녀가 많음에 첩제의 수용을 건의했습니다.

(동방은 오행으로 목에 속하여 그 이수에 따라 남자가 적고 여자가 많으므로 관리들이 처 이외에 첩을 두는 것을 허락하고 관품에 따라 첩의 수효를 줄이고 서인에 이르러서는 1처1첩을 두도록 하며 첩의 소생도 적자와 마찬가지로 벼슬을 할수있게 하여 공녀의 수를 줄여야 한다)고 주장했습니다.

그리고 실제로 그 시기에 여진족과 왜구의 잦은 침략으로 남자들이 많이

죽기도 하여 남자가 적었습니다.

박유가 사심을 가지고 저런 주장을 했는지는 알수 없으나 건의 내용만 보면 적자가 아닌 서얼들도 관직에 나갈 수 있게 하고 남편이 없어 아이가 없는

여성들이 아이를 많이 낳아 인구를 증가시키려는 하나의 방책이고 짝없는 이의 원망도 줄일 수 있다고 했습니다.

 

하지만 법을 집행해야 하는 관료들 부인들의 거센 반발과 비난을 이기지

못해 법은 만들어지지 못했죠.

좀 의외죠?

아내들이 반대한다고 해서 관직에 있는 남편들이 이에 따랐다는 것이요.

고려 시대는 칠거지악을 따지는 조선시대와는 달리 여성들의 권리가 상당했거든요.

이 법을 만들어내면 아내에게 사심을 가지고 법을 만든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려웠음이 자명하기에 만들지 못했다고 생각됩니다~

그런던 어느 날 연등회가 끝나고 저녁에 박유가 왕을 보필하며 나오는 중이었습니다.

그를 본 어느 노인이"저자가 축첩을 청한 요망한 늙은이다"라고 소리를 쳤습니다.

그러자 이를 들은 여성들이 모여들어 손가락질을 하며 욕을 하기 시작했습니다.

심한 욕을 하며 손가락질을 했겠죠.

박유 xxx,박유xxxx,xx박유 등등 욕을 했습니다.

 

 





 

그러던 중 고려에 와있던 서양인들이 이를 보게 된 거죠.

손가락질을 하며 박유 xxx 라고 욕을 하니 서양인들 눈에는 아~박유 박유

하는 것이 욕이구나 하며 느꼈고 검지 손가락질을 하던 것이 서양으로 전해지며 중지로 바뀌게 되었다는 믿지 못할 놀라운 이야기가 전해진답니다 ㅎㅎㅎ

 

 

이상 박유의 일부다처제로 인한 이야기였습니다.

자 그럼 어디까지고 진실이고 어디부터가 재미를 위해 쓴 글일까요^^

절취선이 있는 검은색 글들은 사실에 근거한 글이고 절취선 아래에 있는 파란색 글이 예전에 어디선가 언뜻 보고 제가 각색한 글입니다~

이상 잠깐 웃어보고자 포스팅을 한 송소장이었습니다.

 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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